동란 시대의 시작 영웅삼국지

삼국지의 영걸들 / 기타가타 겐조
1장 "사내와 사내의 만남"

"동란 시대의 시작"

2세기 말. 전한 시대부터 치면 4백년, 광무제가 후한을 재흥시킨 뒤에도 2백년 가까이 흘렀을 무렵, 한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 원인이 된 것은 환관의 전횡으로, 환관정치는 나라의 의사결정기구를 망가뜨려 관직을 사고파는 등의 부패를 불러일으켰다. 한때 전한이 나라를 빼앗겼던 것도 외척과 환관이 정치의 실권을 잡고 제멋대로 정치를 했기 때문이었지만, 후한도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던 것이다. 당시 황제였던 영제(靈帝)는 유약하여 혼란을 바로잡을 의지도 힘도 없었다. 황실의 권위는 수도 낙양에만 닿을 뿐, 지방에선 대부분 토착호족화한 지방관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한이라는 썩어버린 나무에 결정적 일격을 가한 것이 황건의 난이었다.

서기 184년, 중국 북부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시킨 "태평도"라는 신흥 종교의 신도들이 한나라의 천명은 죽었다며, 교조로서 천공장군을 자칭한 장각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황건이란 이름은, 신도들이 표식으로 황색 천을 머리에 두른 것에서 유래했다. 장각이 병으로 죽은 후, 황건의 난을 이끈 장각의 동생 장량과 장보가 토벌됨으로써 반란은 약 1년만에 수습되었지만 후한이라는 국가에 끼친 영향은 컸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대를 동원하고, 그 군대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반란군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군사력을 강하게 의식시키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군인들이 역사의 무대에 올라섰다. 정치적 투쟁도 이미 환관과 귀족 관료만 플레이어가 되던 궁궐내 싸움으로 모자라 낙양에서도, 지방에서도 군대를 키우는 귀족이나 지방관의 존재가 늘어났다. 나라가 황제의 권위가 아니라 군사력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게된 시대를 "난세"라고 부른다. 황건의 난이 일어난지 5년 후인 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열여섯살의 소제가 즉위하자 난세는 단번에 가속했다. 낙양에서 황제의 외척이자 실력자였던 하진의 암살과 그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명문 귀족 원소와 원술에 의한 환관 대학살, 서역 양주에 파견되어 있던 장군 동탁에 의한 낙양 점거, 소제 폐위와 그 동생인 헌제의 즉위라는 커다란 사건이 불과 한달 사이에 잇따라 일어났다. 그야말로 난세다. 나라나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도 룰도 없는 말기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난세는 무용이 뛰어나고 의협심 많은 사내들을 배출한다. 평상시라면 그저 협객의 무리, 난폭한 패거리로 불릴 사내들을, 나는 "협용(俠勇)"이라 부른다. 황건의 난 전후에 이름을 떨친 기도위 조조, 장강 남안의 양주(揚州) 오의 지방관이었던 손견. 중원에서 제주(諸州) 해안까지 싸움터를 전전하며 기반을 다진 기도위 공손찬과 그의 친구로, 동료들을 모아 의용군으로서 황건의 난 토벌에 참여했던 유비. 아직 이십대 초반부터 삼십대 초반이었던 그들이야말로 젊은 협용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직 무명이던 무수히 많은 협용들이 존재했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권력을 쥔 동탁은 그 뒤로도 1년 이상 낙양을 점거한 채 전횡을 일삼았다. 그리고 반 동탁의 움직임이 점점 거세지자 헌제를 끼고 낙양에서 서쪽의 옛 수도인 옹주(雍州)의 장안으로 옮겨가며 백성들에게도 이주를 강요, 낙양에 불을 질렀다. 불은 낙양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폐허로 변한 낙양의 하늘에는 타오르고 남은 연기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연기야말로, 협용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봉화라 할 수 있었다.


본문에 나오는 협용이란 단어는 처음에 호걸로 써봤다가 뭔가 느낌이 아니어서 원문대로 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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