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차 예비군 훈련기
07 : 10
눈을 뜨자 먼저 창문을 열어보았다. 어제 일기예보에서 말한대로 비가 내리고 있다.
과연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늘에 절하며 홀로 기우제를 지낸 보람이 있다.

08 : 00
50분까지는 들어오라던데 여유 부리다가는 늦게 생겼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엘리베이터 거울로 쳐다보니 왠 어설픈 군인 하나가 있다.
훈련소에서 사이즈가 맞는지 어떤지를 확인할 때를 끝으로 지금껏 걸쳐본 적도 없던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입가가 올라간다. 거의 3년만인가.

08 : 50
사방이 온통 군복 천지라 마치 훈련소에 처음 들어갔던 때를 보는 것 같았다.
허나 여유가 흐르다 못해 넘치듯 보이는 사람들과 각양각색의 복장, 입에 꼬나문 담배들의 자태가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훈련소의 훈련병이 아닌 전설의 예비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선배님들 얼른 들어가십니다. 조교의 말에 강당으로 큰 건물로 들어갔다.

10 : 00
사람수가 워낙 많다보니 본인 확인절차에 총을 받고 어쩌고하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연대장인지 누군지에게 간단히 경례 자세로 입소 신고를 했다. 물론 이것도 연습만 10분은 한 것 같다.
아침에 비가 온 관계로 사격을 제외한 훈련은 모두 강당 안에서 비디오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한다.
나도 이때는 강당을 울리는 환호와 박수 소리에 섞여 마음껏 기쁨을 표출하고 있었다.

12 : 30
...너무 잤더니 잠이 안 온다.
그리고 딱딱한 나무 의자 덕분에 한참을 같은 자세로 졸다보면 엉덩이뼈가 욱신거리며 마비가 온다.
자리가 워낙 좁아서 발을 쭉 뻗어볼 수도 없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밖에 나가 훈련하는 게 낫겠다 싶다.
멍한 표정으로 흘러나오는 비디오를 바라보니 훈련소에서 보여준 것과 비슷한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고
주위를 슥 둘러보니 강당의 80%는 이미 제각각의 자세로 저 멀리 꿈나라를 거닐고 있었다.

12 : 50
밥먹을 시간이라며 한창 보고 있던 비디오가 꺼지고 강당에 불이 들어왔다.
적당한 곳에 걸터앉아 점심으로 받은 도시락을 먹었다.

14 : 20
줄이지만 줄로는 보이지 않는 괴상한 행렬로 뭉쳐 사격장으로 올라갔다.
30분 정도 기다린 끝에 우리 차례가 왔다. 한 번에 여덟 명씩 올라가 여섯 발을 쏜다고 한다.
차례에 맞춰 올라가보니 한 명씩 붙어있는 조교가 다 해주더니 쏘시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한다.
사격 개시 신호에 맞춰 여섯 발을 쐈다. 조교에게 수고하셨다고 말해주고 표적지를 걷어서 내려왔다.
여섯 발 중 세 발이 맞았다. 그것도 과녁과는 전혀 상관없는 구석탱이에 몰려서.

17 : 10
잠도 안 오고 좁은 의자에 처박혀 비디오만 쳐다본지도 몇 시간째, 드디어 오늘 하루 일정이 끝났다.
일정이라고 해봤자 정말 별 것도 없었다만...

17 : 30
느리적거리며 밖으로 나가 군장과 총을 반납하고 6천원을 받았다.
하루 종일 말도 안 듣는 예비군들 덕분에 고생한 조교들과 교관들에게 박수도 쳤다.
그리고 간단한 교관의 인사말을 끝으로 1년차 예비군 훈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by 뇌세척 | 2008/05/30 00:55 | 훈련소 일기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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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ackSuiVan at 2008/05/30 01:04
야비군.......은 역시 강합니다. 네. 특별하게 강합니다.
Commented by 뇌세척 at 2008/06/01 13:43
LackSuiVan 님#
분위기만 보면 날아가는 헬기도 쏴서 떨어뜨릴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동사서독 at 2008/05/30 01:05
딱딱한 나무 의자 ... 참으로 큰 고충이죠.
다시 예비군 훈련을 가게 된다면 휴대용 방석이라도 가지고 가고 싶어집니다.
Commented by 뇌세척 at 2008/06/01 13:44
동사서독 님#
정말 방석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더군요.
그렇다고 정말 가져가서 깔 수도 없고 이거(...)
Commented by 프랑스혁명군 at 2008/05/30 08:24
전 5월 8일에 받았습니다.
원래 그 때도 비 온다고 하더니만, 비는 커녕 해만 쨍쩅하더군요.-_-;
그래서 결국 사격과 함께 각개전투, 전술 훈련 등 모두 다했습니다.
6천원이라... 많이 받으셨네요.^^
전 2천원과 빵, 우유 등을 받았습니다.
Commented by 뇌세척 at 2008/06/01 13:45
프랑스혁명군 님#
하늘의 가호를 받지 못하셨군요;
돈은 식비가 4천원이고 교통비가 2천원이던가요?
뭐라고 들은 거 같긴 한데 잠결에 들어서 기억이(...)
Commented by 곰돌이 at 2008/05/30 22:49
저도 공익인지라 오랜만에 군복을 입으니 정말 어색하더군요. 더군다나 1년차라서...2년차 부터는 조금 익숙해지겠지요...과연...만사가 다 귀찮아지던 예비군 훈련이었습니다.
Commented by 뇌세척 at 2008/06/01 13:45
곰돌이 님#
예산 낭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5/31 02:36
내년엔 익숙해지겠거니 해도, 소집해제 될 때까지도 매년 겪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게 동원훈련이긴 하지요.

...이제, 2년차부터 선택지가 열리겠군요.
동원소집으로 2박 3일 숙식을 하던가,
아니면 미지정으로 걸려서 3일간 출퇴근하거나... (후자가, 정말 개고생...;;;)
Commented by 뇌세척 at 2008/06/01 13:46
paro1923 님#
3일간 출퇴근이라니, 생각만해도 끔찍하네요;
Commented by K\' at 2008/05/31 06:49
아직은 방산중이니 군복입을일은 없겠지만...왠지 귀찮아 보이는군요.
Commented by 뇌세척 at 2008/06/01 13:47
K\' 님#
가만히 앉아 비디오만 보려니 정말 지겹더군요.
뭐 그렇다고 막상 훈련한다고 하면 또 귀찮다고 뭐라 하겠습니다만(...)
Commented by 깽히 at 2008/05/31 09:09
예비군 훈련이 이런 과정이었다니...
Commented by 뇌세척 at 2008/06/01 13:48
깽히 님#
아침에 비디오 보고 한 것에다가 프랑스혁명군 님이 말씀하신
각개전투와 전술 훈련 같은 걸 더한 거라고 치면 되겠네요.
각개전투, 전술 훈련...써놓고보니 벌써부터 내년에도 비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군요.
Commented by 후뉘학상 at 2008/06/22 02:08
음 저도30일에 훈련받으러 53사단에 갑니다ㅠ 공익훈련 이지만;; 전 부산쪽이라 약간 빡시게 시킨다는데 창원쪽에는 뭐 훈련 시키느니 마느니 하는 분위기라더군요-_-;; 그런데 훈련마치면 훈련비(?)는 주던가요ㅋ
Commented by 뇌세척 at 2008/06/22 02:33
6천원 받았습니다.
4천원 식비와 2천원 교통비 이렇게 해서 준 것 같은데
제대로 듣질 않아서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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